[카타콤소식 2017.9. 특집2] 조선 땅에 들어온 신사와 그 악영향 및 제사장적 회개

 

인류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가 강렬하게 임한 평양 대부흥은 한반도 전역에서 감사와 감격의 찬송이 울려 퍼지게 하였다. 그러나 불과 30여년 간 지속된 부흥의 열매는 급브레이크를 밟은 승용차처럼 멈춰버리고 말았다. 당시 조선교회가 일제의 악랄한 핍박 앞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가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천조대신 외에는 참신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렸던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일부 목사님들과 성도님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교단과 교파가 배교하였다. 한반도 땅에 세워진 ‘신사의 분포’와 ‘신사가 들어온 경위’ 그리고 해방 후 ‘신사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살펴보면 신사참배를 통해 행한 우리나라와 민족의 신앙적 배반이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시게 하는지 알 수 있다.

 

1893년 신토의 일종으로 알려진 천리교가 부산에서 포교를 시작하였다. 1920년말에는 총독부의 보호 아래 천리교, 금광교, 신리교, 대사교, 실행교 등 5개 종파가, 1941년말에는 교파신토 13개파 가운데 무려 10개 교파가 한반도에 침투하여 포교 활동을 했다. 특히 교파신토는 일제에 의하여 ‘국가신토를 위한 선도자’ 역할을 담당하여 총독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교파신토는 종교요, 국가신토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기만적 이론의 기반이 되었다. 국가 신토가 한반도에 자리잡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일제 때 조선 땅에 세워진 신사는 모두 1,141개였다. 그 중 가장 격이 높은 신사를 관폐신사라고 하는데 조선신궁과 부여신궁이다. 그 하위 신사를 국폐소사라 한다. 경성신사, 강원신사(춘천), 대구신사, 평양신사, 광주신사, 함흥신사, 전주신사 그리고 용두산신사(부산) 등 모두 8곳에 세워졌다. 더 아래 등급의 작은 신사들도 있었는데 전국에 약 1,000여곳에 세워졌다. 관폐신사와 국폐소사 그리고 나머지 소규모의 신사들이 남북한에 걸쳐 전국적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신사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모신 곳이었고, 신사에서의 신앙행위는 새긴 우상과 형상을 만들어 그것에 절하며 섬기는 것이었다. 태양여신인 천조대신과 태양여신의 아들인 천황을 우상으로 숭배하므로 십계명의 제1, 2계명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명백한 배교행위였다. 시편 121편 기록자가 시온산을 가득 메운 산당들을 보고 하나님을 우러러 탄식하던 모습이 당시 조선 땅에서 재현된 것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신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려던 일제의 간악한 궤계는 조선신궁이 세워지는 과정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조선신궁이 진정한 신사가 되기 위해서는 천조대신과 메이지 천황을 맞이하는 의식을 거쳐야 했다. 그것이 바로 ‘진좌제’라는 것이다. 1925년 10월 15일 조선신궁 진좌제를 맞이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신궁에 모실 신들의 신체(신사의 예배 대상, 영대(靈代), 정체(正體), 어신체(御身體)로 불림)를 일본에서 들여왔다. 조선총독부는 조용히 신체를 운반하는 관례와 달리, 수많은 조선인들을 의도적으로 동원하여 많은 인파가 모인 거대규모의 행사로 꾸민 다음 천조대신이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넘어온다는 느낌을 주도록 성대한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일본에서 보낸 신체는 부산역에 당도하였고 부산역에서 출발하여 경성역에 도착하였는데, 조선의 주요도시들을 땅밟기하듯 순서대로 점령하며 북상해 올라오는 루트를 거쳤다. 그 클라이막스는 신체가 경성역(서울역)에 도착하는 10월 13일이었다. 경성역은 1925년 9월 30일에 신축되었는데 신축 후 처음 들어온 열차가 조선신궁 신체를 실은 열차였고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보란듯이 신체가 경성역에 도착한 것이다. 조선신궁 신체가 경성역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일본의 근대화된 문명이 미개한 조선 땅에 혜택을 베풀기 위하여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조선신궁의 신이 일본의 영권(靈權)을 가지고 조선으로 침노해 들어왔다는 영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 역사적 사실의 이면에는 내력이 있고 내력 중에도 영적인 내력은 역사의 흐름을 좌우한다. 이리하여 이세 황대신궁을 일본 전역에 정점으로 두고 그 직계로 조선신궁과 부여신궁 두 관폐신사를, 그 아래 도별 1개씩의 국폐신사 그 다음에 일반 신사들을 둠으로 조선 땅 구석구석까지 신사가 세워졌다. 외연적으로는 황민화 정책의 거점망이 구성된 것이었으나 영적 측면에서는 일본 본토의 태양여신과 천황이라는 악의 세력이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기 위해 견고한 진을 형성한 것이다. 이후 연쇄적으로 신사참배 인식운동, 신사참배 권유운동, 동방요배, 목회자들의 근로봉사(부일협력), 국방헌금, 휼병금, 무운장구기도회, 시국강연회, 전승축하회, 일본군 위문, 일제에 전투기 헌금, 신사참배 거부목회자 파직 등이 이어지면서 차마 형언할 수 없는 배교적 행위들이 한반도를 죄악으로 얼룩지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셔서 일제로부터 지키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은 갑작스런 해방을 선물로 주셨다. 일제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조선교회가 36년간의 암울한 역사가 종결되면서 8·15 해방을 맞이한 이후 한반도 땅에서는 예배당 재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신사가 세워져 있던 자리도 교회터로 탈바꿈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신토침례와 신사참배로 하나님을 배교하였던 교회들이 철저한 회개의 과정을 생략한 채 버젓이 교회로 재건되어 예배를 드리고 입당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광복 직후 남겨진 천리교의 신사 터는 미 군정청과 교섭하여 조선신학교 소유로 불하되었고 거기에 교회들이 세워졌다. 남산은 아래에서 올려 보면 경성 어디서든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였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경성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일제가 세운 신사는 조선의 중심인 경성을 송두리째 장악하고 본토인 일본을 향하여 마주보고 서있는 모양새로 세워졌던 것이다. 이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 별관 자리에 대한예수교장교회신학교와 기독교박물관이, 남산 북쪽 기슭 경성신사 자리(중구 예장동)에는 숭의여고와 숭의여자대학교가, 또 그 아래 신토 절간 자리에는 C교회와 현재의 H신학교를 후신으로 하는 신학교가 점유하였고 서울역 맞은 편 동자동의 천리교(신토에 소속된 종파) 본부 자리에는 한국 제일의 근대식 건물을 자랑하는 Y교회가, 장충동의 서울 지부 자리에는 K교회가 들어섰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신도침례와 신사참배에 대하여 회개하지 않은 한국교회가 신사가 위치했던 곳을 예배당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현실이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배당은 건물일 뿐 성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여 계심으로 오늘날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토침례와 신사참배에 대해 회개하지 않은 주의 백성들이 신사가 세워진 곳에 예배당을 짓고 예배한다면 그곳은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던 신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예배자들의 주인이 여전히 천조대신이고 천황이기 때문이다. 신도침례와 신사참배에 대한 통절한 회개 없이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또다른 형식의 동방요배일 뿐이다. 회개없는 예배는 죄로부터 도피하는 가면 무도회일 뿐이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되풀이된다. 마리아 숭배의 여신 사상에 물든 왜병들 18,000여명에 의해 강토가 피로 물들었던 약 7년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태양여신을 숭배하는 악의 세력들이 우리나라와 민족을 압제하였던 일제 36년, 사단이 즐기는 피의 제사와 다름없는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한반도의 분단의 역사 72년,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남북문제와 정치·사회·문화·군사적 혼란과 교회와 성도의 타락… 이 모든 일과 그 과정은 예레미야서에 등장하는 하늘황후인 태양여신과 인간에 불과한 천황을 신으로 숭배한 죄에서 잉태된 결과들로써 우리나라와 민족에게 고통과 비극의 연속이었다. 청산되지 않는 역사적 정황은 회개로 정결케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했던 모리아산은 순종의 터였다.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인구조사의 죄를 범했을 때 그로 회개케 한 곳인 아나우라의 타작마당은 바로 모리아산 아브라함의 순종의 현장이었다. 순종의 역사가 서려있는 회개의 땅이었던 모리아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솔로몬 성전이 들어섰다. 반면 바벨탑이 세워졌던 시날 땅은 인본주의가 극에 달하였던 바벨론 지역이었다.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민족을 징계하는 일에 쓰임받지만 결국 멸망하는 족속의 대표적 이름이 바벨론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는 처참한 유배의 땅 이름도 바벨론이다. 회개없는 악의 땅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패역이 저질러지는 악한 곳으로 남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한 땅에는 하나님의 집이 들어선다. 순종의 땅 모리아이자, 회개의 땅 아나우라였던 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들어섰던 성경의 역사가 신사로 가득찼던 한반도 땅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아니라 태양여신이 최고의 신이라고 선포하였던 신도침례(미소기바라이)의 악행은 회개해야 마땅한 우리민족의 원초적 죄이다. 전국 곳곳에 설치된 신사에서 우상에게 절하며 하나님을 배반하였던 신사참배의 죄는 회개하여야 마땅한 과거사이다. 뼈아픈 과거와 숨겨진 역사적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반드시 넘어서야 할 산이다. 회개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정서를 동반하지만 결국은 우리를 소망으로 인도한다. ‘실망’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표현해야 마땅한 영적타락에서도 일으켜 세워 하나님을 향한 ‘앙망’으로 바꾸어 주는 회복의 능력이 회개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거룩한 슬픔의 회개’ 너머에 ‘더할나위 없는 회복의 기쁨’이 우리나라와 민족을 기다리고 있다. 한반도 땅에는 살벌한 전쟁의 위험이 상존한다. 교회는 일상적으로 심각한 타락과 분열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선교의 대열에서 주역이 될 우리나라와 민족을 향해, 특별히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인 우리에게 제사장적 회개의 기도를 간곡히 요청하신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자가 없으리라” (렘 4:4)

황제롬 목사(미국 목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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