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지켜져야 합니다. 어렸을 때의 약속이었든 나이가 든 후의 약속이든 간에 말입니다. 6·25 전쟁 중에 어머니는 일곱 살 꼬마였던 저에게 북한에 선교하러 가야 한다고 이르셨습니다. 10년이 지나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는 제가 하나님께 바쳐진 아들이라면서 북한에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하신 어머니는 다음 해 “아들들을 주께 맡깁니다”라는 기도를 하시6고 세상을 떠나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저의 북한으로의 발걸음은 마흔이 넘어서야 이뤄졌습니다. 1970년 판문점에서 북한을 바라보았고, 세월이 지난 1983년 저는 압록강 변에 울며 서 있었습니다. 5년이 지난 1988년 9월 서울에서 “북한도 복음화 하라”는 부제를 달아야 했던 Love North Korea ’88 심포지움을 열었습니다. 바로 그해 겨울, 저는 성탄절이 지나 처음으로 평양에 발을 디뎠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일이 없는 듯 조용했지만 북한선교가 시작되어 성경을 북한 땅으로 들여보내고 있었고, 북한성도들을 만나고 돕는 일들은 계속되었습니다. 조선족들을 통해 무엇이든 도왔습니다. 하지만 그 일들만으로는 북한선교를 한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의약품을 보내주고 양식을 공급하는 일, 고아원을 돕는 일은 복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병원이나 학교 혹은 공장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선교라고 믿어지지 않아 “내 입을 열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말씀을 선포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순교 당했습니다. 어머니와의 약속 중에 “살아 나오지 말고 거기서 죽어 거기서 묻혀”라신 말씀을 기억만 할 뿐 이루어 드리지 못한 저는 불효자식입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책망하셨습니다. 1990년 8월 4일 비행기 안에서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너는 네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만 만나, 하고 싶은 말만을 했을 뿐 하나님 나라 복음을 말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증인으로서의 말과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사영리도 전했고, 톰슨 성경 75권도 북한에 가지고 들어가 전했습니다. 여전히 북한으로 성경을 밀반입하였고, 중국에 나온 북한성도들과 만나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기회를 따라 말씀을 그들에게 전했고 세례를 베풀었지만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설교와 말씀을 전할 기회를 찾으려고 시도했지만 제 입을 열어 선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 천당”이라는 말조차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를 책망하셨습니다. 분명하게 들려온 그 책망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울며 회개하고 또 울었습니다. 침상에서 소리 내어 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1996년까지 눈물로 회개하며 기다렸습니다.

 

7년을 회개하도록 만드신 것이었을까요?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7년이 지난 후, 저는 아내와 미국의 두 형제와 함께 다시 평양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증인으로서의 자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리, 목사로서의 자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하나님과의 약속이라고 믿었기에 10명이 모인 자리에서 소리를 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증인의 자리에서 30분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아내와 함께 숙소로 돌아와서도 도청 장치 앞에서 북한 땅을 축복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새벽에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가기 전, 위원장이셨던 분이 저를 불렀습니다. 그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뭔가 이야기를 하기 원했습니다. “이 목사! 나도 용서받을 수 있소?” 그는 밤새 울었다고 했습니다. 혹시나 용서받을 수 없을까 하여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짧은 대화 후에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출국 수속을 하는 동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전날 밤 고려호텔의 한 방에서 선포한 일이 두려움이 되어 저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그들이 제게 들려준 말은
“조국을 위해 그 많은 의약품을 보내주어 고맙소” 였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했지만 떠나지 않을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이었습니다.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까지의 길고 긴 시간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했지만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북경에 도착해서야 ‘살아 돌아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아내가 “당신 지난밤 설교 정말 뜨거웠어. 살아있는 메시지였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함께 동행했던 두 미국인 형제 중 하나가 식당에서 울며 간증을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듣는 동안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토록 위대한 것임을 처음으로 경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형제는 지금까지 북한선교를 위해 협력하고 있습니다. 10명중에 한 사람이었던 고위 공산당 당원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십자가의 도를 선포한 결과는 두 사람뿐입니다. 그 감격이 제게 자주 되살아나는 것은 은혜일 뿐입니다.

 

그 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기회가 다시 주어졌습니다. 북한 쪽 판문각에서였고 그 자리에 19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한 후 한 소좌와 뜨거운 악수를 했는데 그는 “오래 살라요, 십자가의 도를 더 전해야 될 것 아니갔소!”라고 귀엣말로 전해 주었습니다.

 

그 후 1998년 평양에서 저와 아내를 억류하려던 계획을 막아준 분이 이승만 목사님입니다. 이 목사님이 고려호텔 로비에서 큰 소리로 “여러분! 바로 이삭목사님이 북조선 사랑운동을 시작한 분이요!”라고 외쳤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조용히 평양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왜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쳤는지를 묻자 “사실이잖아!” 라고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Love North Korea ’88-북한도 복음화하라고 외쳤던 1988년의 서울 영락교회에서의 일을 기억하셨던 것일까요? 올해로 30년이 되었습니다. 핍박을 당하고 고난 속에 있었던 기간이었습니다.
저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원수를 용서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십니까?

 

무익한 종 이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