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칼럼] 엄마, 저 사람들을 언제까지 도와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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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만 두 살이던 1947년 황해도 고향을 떠나 서울의 냉천동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 부친께서 삽교로 파송 받아 함께 떠난 우리 가족은 부활절 예배 후 6·25 전쟁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짐 보따리에 얼마간의 돈을 넣어 가지고 떠났지만 소련군이 관리하는 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빼앗겼으며 그 밤에 남한으로 넘어와야 했습니다. 그 날부터 저희의 삶은 거지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니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어린 저는 집에 남겨져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합니다.

 

목사 가정이 피난길에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제주도 성산포로 피난 갔을 당시 5~6세였던 제 모습은 거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먹을 것을 공급받게 도우셨습니다. 그 때 누군가 저를 위해 쌀과 보리밥, 강냉이 죽을 공급했습니다. 집은 수용소로 사용되던 학교였으며 옷은 걸치는 것뿐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 삽교로 돌아온 우리 가족은 교회를 논산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논산에서 목회를 하시던 외할아버지는 연약한 어머니를 안쓰럽게 여겨 돌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당시 한국 땅은 거지들과 문둥병자 그리고 상이군인으로 넘쳐났습니다.

아버님이 강경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누군가 자전거를 보내 주었고, 아이들에게 젖을 짜서 먹이라며 양을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옷들을 보내오기도 했는데 가끔 주머니 속에 장난감이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칠 때 아버님은 다시 서울로 파송되셨는데, 미국인 선교사들이 저희 집을 드나들었습니다. 그 분들은 올 때마다 밀가루며 쌀 등을 차에 싣고 왔고, 저희는 그것을 교회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모두들 가난했기에 교회목사 가정이었던 우리는 그것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도 어렵고 힘들었지만 찾아오는 거지들을 먹여야 했습니다. 심지어 어머니는 거지들을 먹일 쌀을 구하려고 피를 팔기도 했습니다. 교회성도들 중에는 볏 집에 싼 계란 두 줄을 사서 한 줄은 목사 사택인 저의 집에 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거지들을 먹이라고 닭을 사서 사택에 놓고 가고, 어느 때는 쌀가마니가 문 앞에 놓여 있었으며, 당시 국회 부의장이었던 황성수 박사님은 연말마다 쌀과 사과상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8월과 12월이 되면 저희를 산에 보내 기도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중에 잊혀지지 않는 말씀이 “모였던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사…”라던 오병이어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그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너도 주님처럼 민망히 여겨 저들을 먹이고 입힐 때가 올게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전히 가난했고 쌀독을 박박 긁어야 하는 일이 제 몫이었습니다. 거지들에게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해 나누었지만 정작 저희는 늘 배가 고팠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들이 먼저다”라는 한 마디 말씀을 하시고는 그들부터 먹여 보냈습니다.

 

황해도 장연에서 부농의 지주 딸이었던 어머니는 가난한 교회목사의 아내였지만 배고파 찾아오는 이들을 먹이고 나눠줘야 했습니다. 그 어머님이 제게 미국 시민권이 있으면 북한 고향에 가서 전도할 수 있다며 다독이셨습니다. 그렇게 배고파 찾아오는 이들을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먹이라 하시던 어머님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어머니께서 제게 남겨준 것은 바로 예수 중심의 삶이었고, 그 예수의 삶을 배워 나누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남겨진 저희 가족을 미국에 갈 수 있게 역사하셨습니다. 이민 생활을 시작한 제게는 돌보아야 할 동생들이 있었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워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신학을 하고 목사로서 그리고 공산권 선교를 시작한 저를 돌봐주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선교기관들도 있었고 훌륭한 영적 선배님들이 있었습니다.

 

1983년 저는 순전히 선교정탐여행으로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제 눈에 보인 중국은 거지 나라였습니다. 홍콩의 뒷골목부터 시작해서 동북 삼성의 도시와 시골 곳곳마다 거지와 배급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을 도울 능력이 없었습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이 그 곳 성도들에게 한 권의 성경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제게 그들을 위해 써달라며 선교헌금을 맡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요청하는 그들의 필요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몇 십 년 동안 성경 없이 말씀을 듣지 못하고 혼자서 울며 믿음을 지켜 온 성도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성경배달이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부동산을 팔아 성경을 구입해 배달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공산권 선교에 부정적이었고, 여행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에 저는 가방 한 개 두 개 조금씩 더 배달한 것이 모퉁이돌선교회의 사역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경학교로, 신학교로, 목회자 양성으로, 교회개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경을 배달하다 잡히고 고난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렸습니다. 구제는 다른 분들이 조금씩이라도 하는 것을 보았기에 성경배달에만 집중한 것입니다.

 

2002년 1월 1일 새벽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덜덜 떨며 제 옷을 달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날 제 가슴은 감당할 수 없이 아팠으며 이제는 이것도 좀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배달은 지속되었고, 방송선교도 끊임없이 감당할 것이지만 구제도 확대시켜야 했습니다. 저와 모퉁이돌이 해야 할 일임을 알게 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저희는 정말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빈손으로 시장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이것 저것을 집어주기도 하시고, 또 다음에 돈을 달라며 외상으로 쌀을 비롯한 먹거리를 주시고는 하셨습니다. 저는 그 손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손길이 있었기에 지금 제가 살아 있습니다. 그런 손길들이 있었기에 미국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손길들이 있었기에 선교를 시작하게 됐고, 그 손길이 있었기에 성경을 배달했습니다. 그런 손길이 있었기에 저는 북한에 교회를 세우고 지도자를 먹이고 입힐 수 있었습니다.

그런 손길이 있었기에 의약품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선교지로 떠나는 제게 50만 원의 현금을 쥐어주는 이가 있었습니다. 제가 50만 원이 정말 필요했는데,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공항에서 그 50만 원을 제 손에 쥐어주신 것입니다. 그 누군가의 손길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 북녘 땅에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35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어갔으며, 오늘도 북한 땅에서 영양실조로 굶어가며 도둑질을 하며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누군가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 어머니에게 “엄마! 저 사람들은 여전히 거지야? 언제까지 우리가 도와주어야 해?”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들이 여전히 거지로 남아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일이고, 그들을 민망히 여겨서 돌아보는 일이 우리 일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북녘 땅에 또 겨울이 다가오는데 저와 여러분이 장갑 하나, 털모자 하나, 양말 하나,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눌 누군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무익한 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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