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에스더 자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의 니이카타 항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김일성이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하는 말에 속아서 북조선으로 왔다. 그리고 북조선에 도착해 만난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1963년에 결혼했다. 그녀가 두 살이 되던 1975년, 아버지는 ‘일본에 다시 갔으면 좋겠다’고 한 말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뒤 지금까지 소식을 알 수 없다.
어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날 며칠 출장을 다녀온다고 떠난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 되어 회사에 가서 물어보니 보위부에 가보라고 하더구나. 그 말을 듣고 놀라서 보위부에 찾아가니 ‘애들은 남에게 주고 새로 시집가라.’고 하는데 앞이 캄캄해지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단다. 그 때 34살이었던 나는 올망졸망한 애들 다섯을 데리고 살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 막막해서~~~” 어머니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을 치던 모습을 기억한다.

 

세대주가 없어 늘 힘들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가 정치범수용소에 간 것 때문에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교원들에게 대놓고 따돌림을 당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한 입학원서에 그녀가 ‘아버지 사망’이라고 쓴 것을 본 교원이 “너네 아버지 죽은 거 아니잖아 다시 써라.”라며 종이를 던지고 야단을 치는데 그녀는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교원이 공개적으로 놀리면 덩달아 애들에게 놀림을 당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기가 죽어 움츠리고 살았다.
그녀는 추석명절에 음식을 준비해 산소에 가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 다른 사람들은 죽은 부모님을 추억하고 제사하러 가는데 산소마저 갈 수 없는 것이 싫었다. 죽지도 않은 아버지를 찾아가 만날 수도, 추억할 것도, 사진 한 장 없는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이 싫었다. 친구들이 ‘아버지! 아버지’ 부르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그녀의 가족은 30가구 밖에 없는 작은 동네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정치범수용소에 갔고, 일본에서 온 가족이기에 완전히 감시대상이었다. 동네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거나 물건을 잃어버리면 모든 누명을 그녀 가족에게 씌웠다.
“어느 날 한 집에서 뜨개질 하는 실을 잃어버렸는데 우리 집에서 가져갔다며 집에 들어와 샅샅이 뒤지고 갔습니다. 엄마는 너무 억울해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꺼억 꺼억 우는데, 그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좁은 방 하나에 여섯이 웅크리고 앉아서, 엄마는 울고 있고, 애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엄마를 보며 얼마나 두려웠겠어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얼마나 아버지를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결국 그렇게 힘들게 살았던 어머니는 고난의 행군시기에 자식들을 위해 식량을 구하러 나가셨다가 길가에서 굶어 죽었다.
생전에 “한 번만이라도 고향 땅을 밟아봤으면 좋겠다…”하시던 어머니의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에스더는 결국 살기 위해 북한을 떠났고, 하나님의 은혜로 한 아주머니의 강권적인 부탁으로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에게 아버지는 만질 수도, 느껴지지도 않는 원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3년 전, 선교컨퍼런스에서 말씀을 전하던 이삭 목사가 “여러분은 감옥에 갇혀 받았던 고문 휴유증으로 인하여 기억상실증에 걸려 사랑하는 딸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아비의 그 아픔을 아시겠습니까?”라고 물을 때였다.
“야! 우리 아버지도 저 마음이었겠구나… 감옥에서 고통당하며 얼마나 내 생각을 했을까?”
에스더 자매는 뇌리에 번개처럼 강한 생각이 떠오르자 그동안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아온 것이 미안하고 죄송해 가슴이 메고 코 끝이 찡해 오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 미안해요, 아버지는 감옥에서 그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아버지는 나를 그리워했을텐데 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 미안합니다. 이런 나를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를 부르며 용서해달라고 울부짖어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를 마쳤을 때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다. 그녀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아버지는 기억이나 느낌 등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는 그녀와 가족들을 힘들게 만든 원망스런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불러지고,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고, 아버지의 사랑이 만져지는 것처럼 분명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2017년 6월, 그녀는 복음으로 통일을 준비하는 KRIN JAPAN 모임에 초청을 받아 일본에 갔다. 12일, 모임이 시작되기 전 니이카타항을 향해 가는데 주룩 주룩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차 안에서 그녀의 입에서 억누를 수 없는 뜨거운 기도가 터져 나왔다.

 

이곳 니이카타에 올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북한을 향해 떠날 때 마지막으로 밟았던 이 땅으로 다시 인도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많은 길을 돌고 돌아 이 땅에 올 수 있었던 것은 한 개인의 인생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이미 57년 전에 예정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믿으며 감사 드립니다.
우리 부모님을 비롯한 9만여 명의 재일동포들이 이곳에서 북한을 향해 갈 때는 큰 기대를 안고 갔을 터인데 그곳에서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힘든 삶을 살았음을 하나님 아시지요. 너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다시 일본으로 가봤으면 좋겠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수용소에서 죽어간 그들도 하나님 보셨지요.
우리가 지금 서있는 이 땅은 그들의 마음에 담고 있고 또 한 번만이라도 다시 밟고 싶었던 땅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다시 북한에서 죽어간 재일동포들의 마음과 아픔을 기억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고난 당하며 고통 가운데 힘들어하는 그들을 그려보며 기도합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저를 불러주신 하나님께서 저들을 대신하여 기도하라고 보내신 것은 아니신지요. 하나님, 지금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도 그 땅에서 신음하며 울부짖고 있는 주의 백성들에게도 기적을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가 지금, 이곳 일본 니이카타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출발이 북녘 땅에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점이 되게 하옵소서.
57년 전 희망을 안고 이곳을 떠났지만 절망 가운데 북녘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재일동포들과 그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도록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님의 복음을 나르는 배가 이곳에서 이제 다시 출발하게 하옵소서. 이곳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준비되어 북녘을 위해 기도하며 북녘을 향해 다시 출발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북녘 땅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선포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불러주셨사오니 오늘 또다시 이곳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용서 그리고 사랑이 선포되어 하나님의 사람들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니이카타항에서 눈물로 드리는 에스더 자매의 용서와 화해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며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