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콤소식 2017.9. 특집3] 신사참배 했던 목회자들이 공산정권을 세우는데도 앞장섰다!

 

“목사 동무들, 일제 시대에는 교회가 정부시책에 잘 협조했는데 이 무 슨 소리요. 이제는 우리가 나라를 세우는데 협조를 안 한다면 그것은 반동이요! 알갔소?”
김일성이 성난 목소리로 책상을 꽝! 내리치며 소리치자 순식간에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듯 조용해졌다. 1946년 11월 3일, 주일에 교회를 인민위원 선거장소로 사용할 것을 요구한 김일성에게 ‘북한 5도연합노회’ 대표 7인이 찾아가 항의의 뜻을 표하자 김일성은 국가를 위해 교회가 협조해야 된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대표 7인을 돌려보냈고, 예정대로 주일에 교회에서 선거를 치렀다.
기독교의 선거 참여를 유도하라는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강양욱은 공산정권을 지지할 어용단체에 평양의 유력한 목사들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평양시내 교역자 중에 동조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일제 때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했던 목사나 친일파 목사와 장로를 회유와 협박으로 가입케 하였다. 그리하여 함경도의 조희렴 목사 등을 발기인으로 하여, 1946년 가을 곽희정, 이웅, 신영철, 심익현, 나시산, 배덕영(일제하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이사) 김치근, 황기황 목사 등을 중심으로 ‘북조선기독교연맹’이 조직되었다.
북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한 목사들 대부분은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들로, 강양욱과 함께 연맹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심익현은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교회(지금 평양 만경대구역 칠곡동 칠곡교회 자리) 담임목사로 일제하에서는 친일조직인 기독교내선친목회 회원으로, 신사참배가 가결될 당시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했던 인물이었다. 강양욱은 전 중국 산동지방 선교사로 일했던 박상순을 연맹 위원장으로 1942년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한 황해도 인민위원회 요직에 있던 김응순 목사를 연맹 부위원장으로 세웠다.
김응순은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하여 소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1927년 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21회)하고 그 해 가을 소래교회의 청빙을 받고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6년 해주 제일교회에서 시무 중 황해노회 노회장에 선임되어 황해도 지역의 장로교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평양기독교친목회 회원이었는데, 이 모임은 개신교 목회자들을 대거 친일 활동에 끌어들인 평양 출신의 교육자이자 언론인 오문환이 설립한 단체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단체를 이용하여 기독교 황민화를 추진했고, 김응순은 오문환을 따라 교토에 있는 헤이안신궁, 나라에 있는 가시하라신궁,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신사, 이세신궁 등 여러 신궁을 다니면서 신사참배를 하고 귀국했다. 194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올라 전쟁지원을 위한 예배를 거행하고 교인들에게 헌금을 걷어 전쟁에 필요한 전투기와 무기 등을 기증하고, 전국교회의 종을 모아 헌납한 일도 있다. 1938년 9월 제27회 총회 시 신사참배 결의에 동참하였으며, 1942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31회 총회가 개회되었을 때에 황해노회장으로 재임 시 창씨개명을 하여 아라모리목사라 불렀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3년 5월에 해산을 하고 1943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발족할 때 교단본부의 부총리를 맡았다.

 

김치근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17회 졸업생으로 해방 뒤 교회가 공산정권에 협력하는 일에 앞장섰다. 당시 평서노회의 중진이었던 김치근 목사는 용강에 과수원과 논, 밭 등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적극 협력했다. 이들을 앞세운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면서 1947년에는 북한교회의 삼분의 일이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고, 1948년 조선중앙연감에 의하면 조선기독교연맹원의 숫자는 85,118명이었다. 한편, 1947년 2월 21일 개최된 제 1차 북조선 인민위원회에서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해방 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홍기주 목사와 김책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홍기주는 북한정권 수립 초기 김일성에 협조한 대표적인 기독교계 목사이자 북한 정권 수립에 협조한 기독교계 인사 중 가장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북조선인민위원회에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의 지도적 인사들이 대거 발탁되면서 북한정권의 반종교 선전과 고립정책을 추진해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교회들을 약화시켰다. 이에 더하여 북한당국은 토지개혁을 통해 기독교 세력에 대한 경제적인 탄압을 감행했다.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자가 거의 없고, 놀고 먹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저들은 우리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 라고 한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정권은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한 토지개혁을 통해 종교단체 소유지를 모두 압수했다. 이로 인해 모든 종교 활동의 경제적 기초가 무너졌고, 특히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지주세력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몰락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미신타파돌격기간’을 설정하여, 반종교적 운동을 일으켜 교회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그 결과 1950년 개신교 신자 수는 약 12만 명, 교회 수는 약 1,400개소라고 하는데, 이는 해방 후부터 약 4년 동안 교세의 40% 이상 감소한 것이다.

 

김일성은 노동당 제2차 대회가 열린1948년 3월을 전후로 교회 장로들과 목사들에 대한 공격의 강도를 높였다. 북한정권이 반공 노선을 취하는 기독교 세력을 반체제 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하자,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은 1948년부터 도, 군, 면의 연맹지부를 결성하여 그 조직을 확대해 나갔고, 북한 기독교의 최대 세력인 5도연합노회를 해산시키고 1949년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북조선기독교도연맹 총회를 개최해 총회장에 김익두 목사, 부회장에 김응순 목사, 서기에 조택수 목사(당시 황해도 곡산읍교회, 명백한 친일행위자)를 세웠다. 그리고 북조선기독교도연맹 제3차 총회에서는 새 강령을 채택하여, 강령 전문에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며, 인민공화국 헌법과 정부 정강을 실천한다”고 삽입하였다. 1950년부터 3년간 계속된 6·25 전쟁 중에도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서울에서 ‘서울 탈환환영예배’를 드렸다. 북한교회는 전쟁에 대해 물질적, 정신적으로 지원하고, 1950년 8월 5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는 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들과 각 지구 대표들, 북한 전역의 목사, 장로 등이 참석한 가운데 궐기대회를 열고, 북한의 기독교인들에게 전쟁의 승리를 위해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심지어 8월 13일에는 북한 전 지역에서 전승 기도회를 열어 6·25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성스러운 전쟁’으로 규정해 남한정부와 미군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내리기를 기도했다. 전쟁 승리를 위한 무기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헌납운동에도 열을 올렸다. 북조선기독교도연맹총회 초대 총회장을 지낸 황해도 신천 서부교회의 김익두 목사가 비행기, 탱크, 함선 기금 10만원을 헌납한 후, ‘군기 구입 헌납운동’은 각 지역 교회들로 확산되어 갔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결행하고, 전쟁물자와 전승기도회 등을 가졌던 것과 너무나 흡사한 형태이다. 결과적으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지 못한 교회와 목회자들이 공산정권 하에서도 동일한 죄악을 답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해방 후 김일성이 신사참배에 적극 가담했던 목회자들로 공산정권을 지지하도록 탄압하고, 그에 굴복한 목회자들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신하여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제사장적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고 주의 제단을 재건함으로 갇힌 백성들이 자유로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복을 누리도록 닫힌 문을 여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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