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137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온의 노래를 흐느끼며 부릅니다. 어떻게 남의 땅에서 자기 나라를 기억하며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며 울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왜 우리의 모습처럼 느껴질까요? 명절이면 임진강변에서 북한에 계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절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압록강 강변을 거닐면서, 두만강 강변을 지나면서, 아니 대동강 강변에서, 청천강 강가에서, 눈물짓고 있는 제게 한 안내인은 물었습니다.
“북녘에 가족들이 있소?”
“있지요. 있고말고요. 내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다 내 가족이라오.”
그 안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북한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하는 그 속뜻을 그가 알아들었을까요? 느낌으로는 알아 들었을 터이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목사인 것을 알았기에 그는 머리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끝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형제요 자매인 것을 포기한 채 살아오지는 않았나요?

 

고통하며 신음하는 이들을 보고 아무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죄악입니다. 죽어가는 이를 보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것도 죄악입니다. 북한 땅이 무너져 버린 것을 알고, 그들이 도피해 오는 것을 뻔히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우리. 너무 오랫동안 비참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보고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은 우리입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저 북한 땅의 2천만 주민을 위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을 위한 기도라도, 편지라도, 방송이라도, 중국이든 일본이든지 가서 친척들을 찾는 일이라도, 그것도 아니면 전문적인 선교 기관을 후원하는 일이라도 말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통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볼 수는 없었을까요? 러시아에서 북한에 성경을 보낼 테니 공급해 달라고 할 때 외면해야 할까요? 베트남 성도들이 북한에 가서 전도지를 뿌리고 오겠다고 하는데 모른 체 해야 할까요? 일본에서 같은 요청을 했을 때 저는 감격해서 울고 말았습니다. 성경 한 권 보내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웠나요? 아니요. 모여서 북한의 내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기도하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나요?

 

강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며 그저 눈물만 흘립니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기도에 동참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습니다. 무릎을 꿇어 주십시오. 입을 열어 하나님께 아뢰어 주십시오. 주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무익한 종 이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