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차에 실려서 도착한 숙소의 이름이 ‘천천히’였습니다.
우리말로 ‘느긋이!’라고 옮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치 저를 보고 “얘야! 이젠 좀 천천히 해라!”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였을까요?
전기도 천천히 켜지고 또 천천히 꺼졌습니다.
손이 닿기가 무섭게 꺼지고 켜지는 데 익숙한 저는 좀 당황했습니다.
설교 중에 이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나네요.
부친이 이민 초기에 타신 차가 10분이나 걸려서 발동이 걸렸다고요.
그 덕분에 영화 회사에 가게 됐고 이민 가는 특별한 기회를 얻었다고요.
그 차는 저의 첫 미국 이민 차였고 그 차로 운전 면허를 받았습니다.

 

제가 마음이 좀 급한 편이지만 행동은 굉장히 느린 편입니다.
그런 제가 35년을 달려 온 과정이 느리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되었습니다.
그리 바쁘게 다닌 것 같지 않은데 기록을 찾아보니 2019년에 234번 강단에서 설교를 했네요.
적지 않은 횟수이지만 문제는 바른 소리를 냈느냐는 것입니다.
사역을 시작할 때 파수꾼이 나팔을 제대로 부는지에 관한 말씀인 에스겔 33장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오늘 그 말씀을 다시 읽게 하십니다.
설교를 몇 번 했느냐보다 설교를 바로 했느냐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하십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역합니다.
한국 땅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저 또한 예외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 험악한 한국 교회와 북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북한의 상황이나 알렸고 개인적인 간증에 치중했음을 회개합니다.
나팔수가 나팔을 제대로 불지 못했습니다.
파수꾼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의 소리를 낸 것은 순종이었고 결과적으로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의 순종이 여러분과 나의 죄를 대속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뾰족한 교회의 십자가가 동네마다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위해 피 흘려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 종들의 흔적이 살아나기를 기도합니다.
나팔수로서 파수꾼으로서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제 자신이 죽음에 이르더라도 마땅히 불어야 할 나팔 소리를 내게 되기를 원합니다.
파수꾼으로서 광야의 소리를 외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바로 오늘.
바로 이곳에서 이 시간에 순종하기를 소망합니다.

 

무익한 종 이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