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계올림픽을 전후해 시작된 남북 예술단의 공연과 고위급 회담 등이 이어지면서 남북관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에 대한 지지와 우려의 목소리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북한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백성들이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서울의 한 학교에서 진로상담을 지도하는 탈북민 교사, 이 데보라(가명)선생을 만나 그가 북한에서 직접 보고 겪었던 실상을 듣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마치 하나님께서 “내가 존귀하게 여기는 백성들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 기도하라”는 음성처럼 들려졌다. 그 내용은 끔찍했다. 동역자들에게 함께 기도하기 원하여 정리하였다.

 

“저는 8·18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던 1976년 평양의 김형직 사범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대학이 5년제였는데, 4년을 공부했을 때 국방과학원에서 재직하셨던 아버지의 과오로 인하여 온 가족이 함경도로 쫓겨났습니다. 저의 성적은 최우등이었지만 아버지 문제로 인해 모든 길이 막혀 지방학교에서 10년 정도 교원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마저도 굶주린 가족들을 살려야 했기 때문에 학교를 퇴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팔려가는 여인들

 

1992년의 일이다. 당시 이 선생의 월급으로는 쌀 2kg 밖에 살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부모와 형제들이 일하는 곳에서 돈을 받지 못해 고난의 행군이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이선생의 가족에게 닥쳤다. 이선생은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해 고난의 행군시기 가족을 모두 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장사를 잘하고 있을 때 가택수색을 당해 6개월 동안 어려움을 겪었고, 사기를 당해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런 참담한 상황에서 누군가 중국에 가면 국수장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5~6개월 열심히 돈을 벌면 다시 장사를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강을 건넜다.
그러나 이선생은 강을 건넌지 하루 만에 중국 돈 300원에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함께 강을 건넜던 남자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당시 40세였던 이선생과 함께 28세, 22세, 17세의 여자들은 깊은 산골짜기의 비닐천막으로 갔고 그 곳에서 또 다시 중국 돈 3천 원에 팔렸다. 중국말을 한마디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명씩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이가 많았던 이선생은 제일 늦게 농촌마을로 팔려갔다. 농사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이선생은 몇 년 동안 죽도록 일만 하다가 잡혀 북송이 되었다.

 

 

잡혀가는 여인들

 

“2008년 3월 30~31일 이틀 동안 전국적으로 탈북자들을 검거했습니다. 제가 잡혀갔던 도문변방구류소에도 잡혀 온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배가 남산만 해서 잡혀온 여자가 아프다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속으로 ‘산통이 시작된 저 여자는 운이 좋아 풀려나겠구나’ 했는데 4월 12일 북한 보위부에서 하루 조사를 받고 온성 노동단련대로 끌려갔을 때까지도 그 때까지도 그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아프다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4월 15일 그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즉시 아이를 헌 담요에 둘둘 말더니 산에 가져가 생매장하더라구요.
또 한 여자는 간질로 까무라치곤 했는데 심리적 압박이 심해지니까 북한보위부에 가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간질증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감옥 안에 발진티푸스로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 송장을 치워야 할 지경이 되자 그런 여자들 40명을 청진 역에 갖다 풀어놨습니다. 그 여자가 거기서 발작을 하고 죽었습니다.” 하던 말을 멈춘 이선생은 깊은 한 숨을 내쉬더니 “북한여자들의 운명이라는 것이 기가 막혔습니다”라고 했다.

 

 

강제로 죽임 당하는 아이들

 

“그 때 끌려온 여인들 중에 유독 임신한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1994년 김일성이 죽고 난 후 1996~98년이 제일 어려웠는데 이때 탈북한 젊은 여자들 90% 이상이 남자들에게 팔려갔습니다. 젊은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팔려갔으니 잡혀온 여자들 60% 정도가 임신상태였습니다. 이들 중에 만삭인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배가 볼록 솟아 있는 임산부들까지 모두 끌어가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로 낙태를 시켜버렸습니다.”

 

만삭이었던 3명은 청진집결소로 보내졌는데, 그 중에 함흥의대 출신의 산모가 있었다고 한다. “산모가 설사하면 죽는다는 것을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함흥의대를 졸업한 그 여자가 아이를 낳은 지 1주일간 설사를 해 생명이 위험하니까 집에 연락해 가족들이 데려가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낳은 아이가 죽지 않으면 산모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살아 있는 아이를 두고 나갈 수 없으니 어떻게 죽였는지 알아요?”
이선생은 깊은 한 숨을 내쉬더니 혀를 끌끌 찼다.
“얇은 비닐을 물에 적셔 갓난 아이 얼굴에 덮었습니다. 한주동안 끼고 있던 아이를 그렇게 죽이고 나갔습니다. 그 때 태어난 아이 셋이 다 그렇게 죽었습니다.”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탈북을 결심해 중국까지 넘어와 인신매매로 팔려갔다가, 잡혀 북송 된 많은 여인들은 사람으로 인정되거나 존중 받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이 보다 더 가혹한 고초를 겪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한국으로 가려다 잡혀왔거나 교회 가서 기독교를 접한 것이 드러나면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다.

 

“중국에 다시 나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잡혀갔을 때, 길주에서 온 한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보위부 감옥에서 조사를 받고 노동단련대로 가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보위부원들이 뛰어와서 대열에서 길주아줌마를 끌고 갔는데 누군가 그 아줌마가 교회 가는 것을 봤다고 고발해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때 교회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선생은 그 후에도 한국에 가려다 잡혀 온 두 가족을 만났다. 정치범으로 분류된 그들을 감옥에서는 한 곳에 두지 않고 가족들을 흩어 호실마다 분리해 수용하면서 관리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4번을 탈북해 3번을 잡혀 북송 되었던 이선생은 무슨 말을 하려다 목이 메여 멈추었다. 붉어진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휴지를 건네니 받아 눈물을 닦아 내며 깊은 숨을 토해내더니
“족쇄를 차고 북한에 북송되어 가면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나라 잃은 사람의 설움이…”

 

나라가 백성을 보호하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로부터 무자비하게 당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고 했다.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녀에게 북한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 세계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수령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불쌍합니다. 통일은 하나님 계획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통일을 주실 때까지 어떻게라도 북한의 백성들이 모두 살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는 한국에 와서 처음 급식시간에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준 쌀을 가지고 북한아이들을 한 끼라도 먹게 했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밥 한 그릇이 없어 굶어죽은 아이들이 많은데…’하는 생각을 하니 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선생은 3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고 지금도 교도소,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지?’라고 가슴치며 답답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택해주시고, 훈련시켜 통일시대 북한에 가서 사역자로 쓰시려고 살려준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이선생은 이야기를 나누며 “통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라도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거듭해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