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칼럼] 복음이 전염병처럼 확산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교회에서의 집단적인 모임을 예배의 상징으로 삼았을까요.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 구역예배 등등 예배라는 단어가 붙은 모임이 어느 시점부터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고 헌금하고 축도 받고 흩어지는 상황도 점점 거대해져 갔습니다. 백여 명이 모이던 것이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으로 확대됐습니다. 그리고 대형 교회를 부러워하고 거기에 속했다는 만족감을 느끼기에 이르렀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그런 대형 교회가 나쁘다 혹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꼭 성도의 삶의 기준이어야 할까요? 또 하나, 그런 대형 교회에서의 모임이라야만 예배가 이뤄진 것일까요? 예배는 하나님과 나와의 분명한 의식과 관계에서 하나님만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라야 된다고 믿어 왔습니다.

 

저는 35년 넘게 그런 집단적인 장소와 시간을 들여 예배하지 못하고 사는 지하성도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없이 방송을 듣는 것만으로, 어르신네들이 들려준 것만으로, 중국에 가서 만나게 된 성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세월을 보낸 이들입니다. 그들은 숨어야 했습니다. 기도는 물론 소리 내어 주님을 부르지 못했고 속으로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찬송도 공산당의 노래에다 가사를 꿰맞춰 불렀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못해 도둑질했다며 울면서 헌금을 넘겨 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일에 따로 시간을 내거나 모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저 조용히 주님을 높여 드렸습니다.
그분들은 예배당의 문고리라도 만져 보고 싶어 했습니다. 목사님과 악수 한 번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직접 듣고 싶어 했습니다. 깨끗하게 준비된 헌금을 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축도 소리에 감격해서 울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입술로는 소리 내지 못할지언정 주님을 알게 된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감옥에서 흥얼거리며 주님을 노래했습니다. 바울이나 사도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나요? 북한과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 상황을 오랫동안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한 권 갖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드리는 것이 제게 주어진 사역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카톡 하나를 받았습니다. “… 빨리 끝나야 하겠습니다. 성경도 보낼 곳이 많은데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지난 번 보낸 것 다 떨어져서 보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막혀 보낼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받아야 할 사람을 위해 배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깔린 짧은 글입니다. 성경을 배달하는 일은 바른 예배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사역입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성도들의 삶에 진정한 예배에 대한 이해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예배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받아 든 이들이 고마워하는 모습을 저는 오랫동안 보았습니다. 그 성경으로 인해 매를 맞기도 하고 투옥되며 죽음에 이름에도 불구하고 그 성경책 갖기를 소원하는 이들의 간절함을 아시나요?
집단적인 대형 교회 예배에서 벗어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같은 은혜 입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편 굴속에서 숨어서 드리는 개인적인 혹은 소규모 예배에도 강력한 은혜가 채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일상적으로 드렸던 예배가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예배가 우리 속에 새롭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배할 수 있었던 모든 일을 감사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이 배달될 수 있기를 위하여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역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전염병이 확산되듯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염병처럼 확산되기를 소원합니다.

 

무익한 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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